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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상하이 퐁티니 영사 구조대 비금도 도착해 조운선 2척 빌려 회수 기록 남겨...중국 언론 등에 이방인 융숭하게 대접한 이야기 등 연재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 조선 비금도 표착-3
프랑스 제2제국 상하이 주재 샤를 드 몽타니 영사가 이끄는 구조대원들은 포경선 구조를 위해 ‘Tio-sang’ 섬을 찾아 항해에 나섰다. 상하이를 출항한 지 5일 만에 황해 난류를 타고 항해하여 1851년 4월 25일(양력) 제주도 대정현(大靜縣) 해안에 도착했다. 당시 구조대는 지도를 보유했지만, 그곳이 제주도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 조선 비금도 표착-3
 
 
프랑스 제2제국 상하이 주재 샤를 드 몽타니 영사가 이끄는 구조대원들은 포경선 구조를 위해 ‘Tio-sang’ 섬을 찾아 항해에 나섰다. 상하이를 출항한 지 5일 만에 황해 난류를 타고 항해하여 1851년 4월 25일(양력) 제주도 대정현(大靜縣) 해안에 도착했다. 당시 구조대는 지도를 보유했지만, 그곳이 제주도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몽타니 영사는 대정현을 방문해 제주 목사 이현공(李玄功, 1784~1856)을 만나 선원들의 소식을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하고 식사만 대접받았다. 구조대는 보급 물품으로 황소 두 마리와 쌀, 연료 등을 요청하였다.
 
문신 이현공은 1850년 음력 4월에 제주 목사를 제수받아 6월에 제주로 부임하여 1851년(철종 2) 7월까지 제주 목사를 재임했다. 그는 1851년 음력 3월 금물포(今勿浦, 안덕면 산방산 사계리)에 정박한 구조대가 요청한 품목 중에서 쌀 두 섬, 닭 열 마리, 땔감, 숯 등을 보급했다. 구조대는 답례로 서양목(西洋木) 두 단과 유리병(술병) 16개를 보냈다. 금물포는 1702년(숙종 28) 4월 15일 이형상 제주 목사가 탐라 고을을 순력(巡歷)할 때 기록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검은 질개(黑路浦)라고 표시되어 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사진:국립제주박물관)
 
문신 이현공은 조선왕조 1840년(헌종 6) 성균관 유생에게 황감(黃柑)을 주면서 치른 특별 과거 시험인 황감제에서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문과의 초시와 복시를 치르지 않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얻게 되었다. 1841년(헌종 7)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을 거쳐 승정원 부승지를 지냈다. 목사 겸 방어사로 1850년(철종 1) 6월 장인식(張寅植)의 후임으로 제주 목사에 부임하여 관덕정(觀德亭)을 중수하고, 1851년 제주향교에 서재(西齋)를 건립하여 재생(齋生)들에게 과업을 권장하고, 늠료(廩料: 벼슬아치에게 주던 봉급) 제도를 마련하는 등 교육 발전에 힘썼다.
 
관덕정(觀德亭)(사진:나무위키)
 
동양고전아카데미 《史記》 강의 시간에 김영환(金榮煥) 명예교수는 “활쏘기(國弓)는 인(仁)의 적극적 실천이다. 《예기(禮記)》의 〈사의(射義)〉 편은 유교에서 활쏘기(射)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자신의 인격 수양과 예(禮)를 실천하는 도구로 본다. 활쏘기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내공외순(內功外順)하고 행동을 절제하는 법을 배운다.”라고 말씀하시고 신분에 따른 古代의 射禮를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射는 古代의 射禮를 가리키며 射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a. 大射(天子 또는 諸侯가 祭祀 지내기 전에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 중에서 선발하여 거행하는 射祀)
b. 賓射(諸侯가 천자를 朝見하거나 또는 제후끼리 모일 때 거행하는 射禮)
c. 燕射(평상시 쉬는 날 거행하는 射禮) ;
d. 鄕射(地方官이 어진 선비를 천거하면서 거행하는 射禮이고, 射禮 전후로 항상 술을 마신다. 鄕射禮는 또한 항상 鄕飮酒禮와 동시에 거행한다.); 방법은 射禮는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서로 揖을 한 이후에 射臺에 오른다. 활을 다 쏜 후에 다시 서로 읍(揖)을 하고 내려온다. 이후에 다시 서로 揖을 하고 술을 마신다.
 
관련 문헌은 《禮記》〈射義〉「射者,仁之道也。射求正諸己,己正而後發。發而不中,則不怨勝己者,反求諸己而已矣。孔子曰..君子無所爭,必也射乎。揖讓而升,下而飮,其爭也君子」 이다.
 
이현공 제주 목사가 1850년 중수한 관덕정(사진:김준)
 
제주 관덕정은 조선왕조 1448년(세종 30) 목사 신숙청(辛俶晴)이 군사들의 훈련청으로 창건한 건물이다. 관덕(觀德)은 《禮記》〈射義〉 문헌에 나오는 “활쏘기는 진퇴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예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고,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어야 적중을 말할 수 있다. 활쏘기는 덕행을 살필 수 있다.”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출전】 「射者 進退周旋必中禮 內志正外體直 然後持弓矢審固 持弓矢審固 然後可以言中 此可以觀德行矣。」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예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작품이다.
 
화북 비석거리(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 목사 이현공은 삼천서당과 삼성혈 사우(祠宇), 제주향교를 개건하는 등 공청(公廳) 정비에 힘썼다. 1851년 4월 기록을 살펴보면 비변사에 의해 파출(罷黜: 벼슬에서 쫒아냄)의 청이 있었는데, 그것은 경기도 여주(驪州) 수재(守宰: 지방관)로 있을 때의 연관된 일로 철종 2년(1851) 7월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파직되었다. 이현공 제주 목사의 선정비는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삼성혈, 화북 비석거리에 있다.
 
이현공 제주 목사 후임으로는 백희수(白希洙)가 부임해 2년 6개월을 재임했다. 백 목사는 제주도의 여름 가뭄이 닥치자, 조정에 장계를 올려 제주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여 湖南 별저미(別儲米) 1,500석을 요청해 지원받고, 내탕전(內帑錢) 1,000냥을 특별히 지원받아 궁민(窮民: 생활이 매우 어렵고 궁핍한 백성이나 사람, 鰥寡孤獨:홀아비, 과부, 어리고 부모가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을 진휼(賑恤)하였다. 이러한 선정을 기려 그의 선정비는 제주에 6기가 남아있다. 선정을 베푼 백희수 제주 목사는 철종 4년(1853) 12월에 제주를 떠나, 1860년 3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어사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등 무관 요직을 역임했다.
 
한편, 나르발호 구조대는 이현공 제주 목사로부터 수로 안내원과 양식을 제공받아 금물포(今勿浦)를 출항했다. 구조대는 추자도를 바라보고 북상하며 인근 섬이 보일 때마다 섬 주변을 돌며 샅샅이 수색했다. 12일간 여러 섬을 탐색한 끝에 1851년 5월 1일(양력) 전라 비금도에서 조난당했던 포경 선원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당시 포경 선원들은 비금도 섬사람들의 호의와 지원으로 불편함이 전혀 없고 오히려 친절한 주민들 덕분에 좋은 대접을 받아 불편함 없이 지냈다. 비금도 사람들은 섬 주변을 가끔 다니는 외국 이양선과 외국인을 자주 보아 푸른 눈을 가진 키가 큰 이국인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선원들에게 쌀과 고기, 따뜻한 음식을 충분하게 가져다주었다.
 
추자도 항공사진(사진:이재언)
 
조선왕조 군사, 외교, 행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 의결 기관인 비변사는 초기에는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돈화문 앞에 청사를 두었다. 비변사는 이양인 표류 선원들의 송환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했다. 비금도 풍헌(風憲) 양선규(梁善圭)가 이양선 선원들에게 큰 배와 두 개의 돛 모양을 보여주자, 그들은 손짓으로 20명을 태워 보내 달라는 형상을 하며 애걸하였다. 이런 보고를 받은 비변사는 논의를 거쳐 전라관찰사 이유원에게 나주 근처 조창에 있는 조운선(漕船) 중에서 두 개의 돛이 달린 튼튼한 배 2척을 비금도로 옮기게 했다. 이국인들이 배를 살펴보고 사용하기에 충분하다고 하면, 즉시 식량과 장비를 갖춰 바람(順風)을 기다려 보내주겠다고 풍헌 양선규가 말했다.
 
1550년 비변사 계회도(사진;위키백과)
 
비변사의 명령을 받은 조선 관리들이 이양선 선원들을 강화 영종도 쪽으로 이송하려던 때에 상하이 퐁티니 영사가 이끄는 구조대가 비금도에 도착해 만나게 되었다. 필자는 전라도 관찰사가 비변사에 올린 장계에서 “나주 인근에 있던 조운선 중 튼튼한 2척을 골라 그들에게 주었다.”라고 기록한 글을 통해 당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종실록》 2권, 1865년 음력 7월 27일 자 기축년 기사에 ‘비금도 사건’ 언급 내용이 있다.
 
【출처】
二十七日。 議政府啓: "卽見慶尙監司李參鉉狀啓, 則以爲‘異樣船一隻漂泊于迎日縣 林谷津, 男爲十六名、女爲一名。 而言語不通, 文字莫辨, 何國人物, 無以憑問。 渠等大船, 旣已破傷, 只有三隻從船。 而頭領人之形容動作, 欲借我船然, 卽不過意解者也。 又於法例, 不可擅許, 故借船一款, 以待知委。 而糧饌贈給, 防守諸節, 另加申飭’爲辭矣。 言語文字, 譯解無路, 可以臆度者, 不過是指畫可否而已。 往在辛亥, 羅州 飛禽島有似此之事, 至有借船還送之擧。 今亦以漕船中一二隻出給, 糧饌等節從優裝給, 未還發前入給禁雜等節, 使之各別擧行。 漂人下陸, 出於逃命之計, 則地方官之未及阻搪, 容或無怪, 論罪一款, 置之; 別差之徑先還去, 極爲疎忽, 令左水營嚴棍懲勵事, 分付何如?" 允之。【원본】 6책 2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93면
 
【번역】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삼현(李參鉉)의 장계(長計)를 보니, ‘이양선(異樣船) 1척(隻)이 표류해서 영일현(迎日縣) 임곡진(林谷津)에 정박하였는데 남자가 16명(名), 여자가 1명입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고 글도 분변 할 수 없어서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 물을 길이 없습니다. 그들의 큰 배는 이미 파손되었고 단지 3척의 종선(從船)만이 있었습니다. 우두머리가 몸짓하는 것을 보면 우리한테 배를 빌려달라고 하는 듯한데 이것은 어림짐작으로 이해한 데 지나지 않은 것이고 또 법례(法例)에 있어서 함부로 허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배를 빌려주는 문제는 통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식과 반찬을 주는 것과 방수(防守)하는 여러 절차는 특별히 신칙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언어와 문자를 번역하고 해석할 길이 없어서 억측할 수 있는 것은 손가락으로 가부를 표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난 신해년(1851)에 나주(羅州) 비금도(飛禽島)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배를 빌려주었다가 돌려 보내왔습니다. 이번에도 조선(漕船) 중에서 1, 2척을 내주고 양식과 반찬 등을 넉넉하게 싸주되 도로 떠나기 전에는 들여 주지 말 것과 잡인(雜人)을 금하는 등의 절차를 각별히 거행하게 해야 합니다. 표류인(漂流人)이 육지로 내려온 것이 도망할 계책에서 나왔다면 지방관(地方官)이 미처 막지 못하였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으니 죄를 논하는 것은 그만두고, 특별히 차견(差遣)된 자가 지레 먼저 돌아온 것은 지극히 소홀한 것이니 좌수영(左水營)에서 엄하게 곤(棍)을 쳐서 징계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국보 제152호 《비변사등록》(사진:궁인창)
 
《고종실록》에 실린 글은 1865년에 표착민에게 배를 빌려주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14년 전에 있었던 비금도 프랑스 이양선 처리 시 2척의 배를 빌려준 사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지방관들은 과거 비변사에서 처리한 내용을 기록한 《비변사등록》과 일치하는 내용을 평상시 정확하게 숙지하고 관리의 철저함을 알 수 있었다. 비변사는 조운선 두 척을 상하이 주재 프랑스 몽티니 영사에게 빌려주고 배를 돌려받았다고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중국이 개방되었을 때》 샤를 드 몽티니, 장 프레데 지음(사진;로피오만 서점)
 
비금도에 표착한 프랑스 포경 선원을 구조하러 온 상하이 주재 프랑스 몽티니(Montigny) 영사는 조선의 풍헌(風憲) 양선규(梁善圭) 등 일선 관리에게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자세로 선언서를 전달했다. 조선 관리는 이 문서에 적힌 내용을 전혀 몰랐다.
 
몽티니 영사가 준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위대한 프랑스 왕국의 국민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운명이 그들을 이끄는 그 어디에서든 존중받아야 한다. 비금도 관리의 의무는 조선의 법이 어떠하든 간에, 내 동포들이 최대한 신속하게 청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나는 이 임의적인 행위에 대해 나의 정부에 보고할 것이며, 이것이 지난 10년간 조선의 운명을 짓눌러 온 프랑스 왕국의 복수의 포화(砲火)로부터 조선을 멀어지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수장에게 이 선언서를 가장 신속히 조선왕조 정부에 보낼 것을 요구한다. 이는 위대한 프랑스 왕국이 淸國과의 조약에 따라 광동(廣東)에 대사(Grand Commissaire)를, 그리고 나 샤를 드 몽타니를 상하이와 닝보(寧波)의 영사로 두고 있다는 사실을 조선의 그 누구도 모르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따라서 만약 다른 프랑스인들이 조선에서 아주 작은 모욕이라도 당하거나 자유인으로서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침해받는다면, 나는 6일 안에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프랑스 함포의 천둥소리가 이 왕국의 수도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아주 고압적으로 행동했다.
 
몽티니 영사의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왕조 관리들은 “우리 조선은 기존의 ‘표류민 구조 원칙’에 따라 예전 방식대로 대응할 뿐이다. 선원들이 먼 곳에서 온 손님이니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정부 기조는 변함이 없다.”라고 통역에게 말했다.
 
필자는 〈몽티니 영사 보고서〉를 자세하게 읽었다.
 
〈몽티니 영사 보고서〉 내용
“An entertainment was soon spread out for us in the open yard in front of the cottage, and was served up in a much more inviting way than that of our poor Quelpart General. One favourite dish was veal of excellent quality, cut into small slices and eaten with vinegar, which was also good.
Numerous servants kept the crowd back, so as not to inconvenience us, and the women of the village took up positions behind the neighbouring dykes, so as to command a view of the strangers, but did any one of the latter look round, then down went their heads out of sight like ducks. Their personal appearance however as far as we could perceive seemed by no means dangerous.”.....
 
【번역】
“초가집 앞마당에 우리를 위한 연회를 차렸는데, 제주 목사가 대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먹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특히 인기가 있었던 음식 중 하나는 질 좋은 송아지 고기로 얇게 썰어 식초에 찍어 먹으니 그 맛 또한 훌륭했다. 수많은 하인이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군중을 뒤로 물러나게 했고, 마을 여인들은 근처 둑 뒤에 자리를 잡고 이 낯선 이방인들을 구경했다. 우리 중 누군가 뒤를 돌아보기라도 하면, 그들은 마치 오리처럼 머리를 쑥 내밀어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다. 우리가 본 바로는, 그들의 겉모습은 결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섬의 관리와 네 명의 다른 고위 관료들이 수많은 비서, 장교, 하인들을 거느리고 배에 올랐습니다. 대포 세 발을 쏘아 예우를 갖춘 뒤, 저는 선미에 세워진 천막 아래에서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시간 동안 그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와인과 샴페인, 그리고 독주를 대접했습니다. 아들처럼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을 보기는 참 드뭅니다. 그들은 와인, 특히 독주를 좋아했습니다. 우리 상관들은 본인들이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인들에게도 술을 권했습니다.”
 
North China Herald(사진:騰飛网)
 
상하이에서 포경선 나르발(Narval)호의 이야기는 중국 해안가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맥도널드(MacDonald)가 작성한 상세한 이야기 덕분에 대중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는 이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에서의 대담한 여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흥미로운 일화들을 덧붙여 자신이 겪은 바를 재구성해 상하이의 《노스 차이나 헤럴드(North China Herald)》 신문에 〈조선 해안에서 프랑스 포경선 호의 침몰과 선원들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Narrative of the Loss of the French Whaler Narwal on the Coast of Corea, and Rescue of the Crew) 〉라는 제목으로 1851년 5월 31일, 6월 7일, 6월 14일, 6월 21일, 7월 12일, 8월 30일 6회에 걸쳐 연재 형식으로 게재되었다.
 
7월에는 광둥 《차이니즈 리포지토리(Chinese Repository)》에 요약본으로 실렸다. 그런데, 작가가 프랑스 측의 역할을 조연급으로 격하시킨 바람에 몽티니 영사는 물론 프랑스 외무성(Quai d'Orsay)까지 나서 신문 연재 기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North China Herald〉는 1850년 8월 3일, 영국 경매업자 헨리 셔먼(Henry Sherman)이 상하이 영국 조계에서 창간한 신문으로 매주 토요일에 발행되었다. 신문은 4페이지 분량의 브로드시트로 내용의 절반은 광고와 수출입 통계, 나머지 절반은 논평, 뉴스, 독자 투고로 구성되었다. 1864년에는 북중국일보(North-China Herald)의 부록이 되었으며, 주로 외국 영사관과 직할시에서 발표하는 공고, 명령, 논평, 규정, 회의록, 광고, 투자 정보, 해운 뉴스, 우편 정보 등을 게재하다 1867년 3월 30일 870호로 문을 닫았다.
 
1890년대 상하이 와이탄 전경(사진:위키피디아)
 
비금도 주민들은 처음에 이양인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 측 기록인 《비변사등록》과 현지 구전 기록에는 그들의 외모를 보고 “눈은 파랗고 코는 높으며, 머리카락은 노란색 아니면 붉은색이다. 그들은 마치 산신령이나 도깨비처럼 보인다. 옷은 몸에 딱 붙는 군복과 단추를 입고 옷이 가죽처럼 몸을 감싸고 있어 기이하다. 그들이 먹는 빵과 술을 보고 조선 관리들은 이상한 떡과 핏빛 술을 마신다.”라고 말하며 신기해했다.
 
조선 관리들은 1851년 5월 2일(양력) 밤에 프랑스 영사 몽티니 일행과 떠나는 포경 선원들에게 풍성한 잔치를 열어주었다. 이때 샴페인과 조선의 술 막걸리가 등장하고, 돼지고기, 빈대떡 등 음식이 넉넉히 풍성하게 차려진 가운데 석별의 정을 나누며 정답게 어울렸다.
 
몽티니는 1851년 5월 24일에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사건을 상당히 자기중심적으로 서술하며 자화자찬했다. 그는 “섬의 수장과 고위 관리 4명과 많은 수의 아전과 하인이 배에 올랐고 자신이 대포 세 발로 예를 표한 뒤에 그들을 맞이하고 대접했다. 자신이 함포 사격을 운운하며 호통을 치자, 조선 관리들이 벌벌 떨며 굴복했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조선 측 기록을 보면, 조선 관리들은 이방인에 대해 “말이 안 통하지만 배고파 보이니 일단 먹여야 할 이방인 정도로 취급해 양식과 반찬을 제공하고 이들이 너무나 불쌍하여 위안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후하게 대접하고 점잖게 응대했다.”라고 기록했다. 몽티니 영사가 언급한 조선의 고위 관리 4명과 아전은 김재경 나주목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구장화(具鏘和), 이정현 남평현감, 전라도 수군우후(水軍虞候) 최홍현(崔洪賢), 목포진 만호 조건식(趙健植), 비금도 풍헌(風憲) 양선규(梁善圭) 등으로 추정된다.
 
중국항구박물관 로츠차(사진:궁인창)
 
몽타니 영사는 비금도에서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인도, 필리핀, 조선, 중국인 등 7~8개 나라 사람이 만찬을 함께 했다고 기록했다. 우호적 만남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진 몽티니 영사는 상하이에 돌아가서 자신을 ‘조선에 간 영웅’, 그리고 ‘조선을 개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몽티니는 1851년 비금도를 방문한 이후, 나폴레옹 3세와 외무부 장관에게 프랑스 제국과 조선왕조가 수교를 맺어야 한다고 매년 주장하며 “프랑스 포경 선원의 안전과 물자 공급을 위해 한반도에 여러 곳에 항구가 필요해 서둘러 항구를 개항시켜야 한다.”라는 보고서를 외무부 장관에게 보내며 선교사들의 안전을 위해 조선왕조와의 수교와 경제적인 이유로 수교를 생각했다.
 
1890년대 상하이 와이탄 항구(사진:궁인창)
 
조선왕조 철종(재위: 1849∼1863)은 천주교 탄압을 완화하였다. 몽티니 영사는 서해에 기착 항구가 생긴다면 베이징에 더 쉽게 갈 수 있고, 동해에 기착 항구가 있다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수교 협상 요청을 하였지만, 프랑스 제2 제국 외무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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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엔지니어로 기술고문으로 두 경의선 부설권 차지...체불 임금으로 가난에 허덕이며 고인돌 및 사찰 둘러보고 책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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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소통이 안되어 전라감사 이유원에게 보고...거센 풍랑으로 출항못하다가 늦게 현지 도착, 호수영지에 기록
(2026.05.05. 10:46)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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