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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부르다레의 조선 기행-1
에밀 장 루이 부르다레(Émile Jean Louis Bourdaret, Emile Bourdaret, 1874~1947)는 프랑스 남동부 론 주의 중심도시인 리옹에서 아버지 앙투안 부르다레(Antoine Bourdaret, 건축가)와 어머니 에밀리 메트라(Émilie Métrat) 사이 2남 1녀 중 둘째로 1874년에 태어났다. 8살 터울의 누나 잔 벨로니 부르다레(Jeanne Bellonie Bourdare, 1866~1955)는 리옹의 인류학자이며 고고학자인 에르네스트 샹트르(Ernest Chantre, 1843~1924)와 1886년 결혼했다. 그녀는 동생이 일찍부터 인류학과 고고학에 눈을 뜨도록 도움을 주고 남편의 연구를 도우며 독자적인 여행 회고록을 발간했다.
고고학자 에르네스트 샹트르(Ernest Chantre)(사진:위키피디아)
고고학자는 평생을 코카서스(Caucasus),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의 인류학 연구에 바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을 받았다. 이 훈장은 1802년 나폴레옹 1세가 제정했으며, 프랑스 및 국제 사회 발전에 기여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술 등 각 분야의 공로자에게 프랑스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이다.
기메박물관(Musée Guimet)
그는 리옹대학에 고고학과 인류학 과목을 최초로 개설하고 1877년부터 1910년까지 리옹 자연사박물관의 부관장으로 재직하면서, 38세의 나이인 1881년에 리옹 인류학협회(Société d’anthrpologie de Lyon)를 창립했다. 1924년 11월 24일에 81세의 나이로 에쿨리에서 타계하기 전에 리옹자연사박물관과 론 지방 기록보관소에 자료를 기증했다.
사업가 에밀 에티엔 기메(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사업가 에밀 에티엔 기메(Émile Guimet, 1836~1918)는 여행을 즐기며 예술품과 유물을 수집해 감정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1878년에 고향 리옹에 자연사박물관(Museum d’histoire naturelle de Lyon)을 건립해 동양 종교 및 아시아 예술품을 모두 기증했다. 기메박물관은 사업가 기메의 주도로 설립되어 1889년 종교박물관으로 처음 개관하였다. 1927년에 프랑스 박물관국에 관할하게 되어 다른 개인 소장품과 기증품을 통합했다.
2003년 12월부터 공공 행정기관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기메-국립 아시아 미술관(Musée Guimet)으로 개명되었다. 기메박물관 컬렉션은 아시아로부터 수집된 고고인류학적 유물이 많다.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히말라야 예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인도, 일본의 유물과 사진 아카이브, 음성 아카이브, 도서관을 갖추어 연간 방문객이 30만 명이 방문한다.
기메-국립 아시아 미술관(사진:위키피디아)
E. 부르다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그는 훌륭한 도시 환경에서 성장해 명문학교 라 마르티니에르(Lycée La Martinière Monplaisir)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이 학교는 철도, 도로, 항만 건설 사업 등 국가 기간산업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건설과 토목 계열 그랑제꼴 준비반(préparatoire)으로 아주 특화된 학교였다. 그는 천재적인 뛰어난 학생으로 만 19세에 리옹 에꼴 상트랄(Ecole centrale de Lyon, 리옹 공과대학)를 1893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1893년부터 1910년까지 필립 비탈리(ECP 1851)가 1870년에 설립한 프랑스 레지 철도 토목회사(RGCF: Régie générale des chemins de fer et des travaux publics)에 취직해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RGCF는 철도, 수력 발전소 건설, 도로 부설 등 국가 기간산업 구축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철도 건설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기업 중 하나였다. 그는 터키, 마다가스카르, 조선, 이탈리아, 중국 등에서 현장 관리자 및 컨설턴트로 활약했다.
1901년 Corée E. 부르다레(사진:외교유럽부 기록보관소)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은 대한제국에서 1900~1901년에 우편 및 통신 서비스를 장악하고, 이후 철도운영권까지 확보해서 철도 건설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E. 부르다레가 대한제국에에 파견을 신청할 때 고고학자 매형에게 추천서를 부탁했다. 매형은 프랑스 교육·예술부 장관 레이그(Gerges Leygues)에게 의뢰하여 추천서를 보내주었다. 레이그 장관은 추천서에서 “엔지니어 부르다레는 철도 건설뿐만 아니라, 국립 교육기관에서 동물학, 지질학, 인류학에 대한 전문 과정을 마쳤으므로, 대한제국의 기술 고문관에 최고 적임자이다.”라고 평가했다.
E. 부르다레가 리옹 공과대학(ECL)를 졸업하고 7년 후 앞날이 촉망받는 젊은 엔지니어가 어떤 조건으로 대한제국에 파견되었는지 특별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취직한 회사의 명령으로 파견되었는지, 본인의 인류학 연구 차원에서 희망했는지, 당시 프랑스 제2 식민제국의 공식 요청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두 차례 대한제국에 체류한 것은 확실하다. 1894~95년 청일전쟁 이후 여행을 오고, 1900년부터 1903년까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지시로 파견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정책 가운데 개발 이익이 많은 광산 개발과 철도 건설에 집중하며 대한제국 관리들과 적극적으로 협상하였다. 1896년 7월에 친로파 대신들과 주한러시아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1841~1910)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프랑스 철도회사 피브-릴(Five-Lillie)가 경의선의 부설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피브-릴 철도회사는 자금이 부족하여 1899년 6월 23일 대한제국에 부설권을 반납했다.
1901년 Corée E. 부르다레(사진:외교유럽부 기록보관소)
E. 부르다레는 1902년 프랑스로 돌아와 E.J. 샹트르와 함께 "한국인, 인류학적 개요"라는 주제로 프랑스 과학진흥협회에 논문을 발표했다. 부르다레를 비롯해서 기술 고문관으로 초빙된 프랑스 기술자들이 임금 체불을 이유로 대한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 1902년 9월 4일이었다. 그가 조선에서 머무는 동안 약속받았던 급료가 잘 해결되지 않아 극심한 가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때로는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시를 짓고 조선 고전 문학을 토론하고 기록했다. 대한제국에서 사업 진행이 불투명해지자, 뮈텔 주교를 찾아가 상의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서 프랑스에 조선에 관한 학술 조사를 위한 연구비를 신청할 생각을 하고는 나가사키에 건너가 두세 달 체류하면서 프랑스 ‘교육 예술부’에 〈조선에 관한 학술보고서〉를 제출해 연구비를 확보했다.
프랑스 교육부는 E. 부르다레를 과학조사단으로 임명해 그는 1903년 3월 31일 나가사키(長崎)를 떠나 부산을 거쳐, 4월 3일 제물포에 도착해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교장이 운영하는 관립학교 프랑스학교에 임시 교사로 취직하고는 곧장 개성과 평양 모란봉을 방문한 후 경성으로 돌아왔다. 한강 하구의 강화도를 탐사하고 고인돌을 연구했다. 정족산에 올라 전등사를 방문했다. 북한산 정상에서 경성과 그 주변 지역을 관찰했다. 강원도 험한 길을 따라 금강산 장안사 등 45개의 사찰을 방문한 다음 원산을 방문했다. 바다 건너 퀘일파르트 화산섬 제주도를 탐험하며 장소와 풍경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금강산과 제주도를 방문하고 돌아와 5월 중순에 제물포에서 대한제국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의 국영 우편 선사였던 메사제리 마리팀(Messageries Maritimes, M.M.)호는 제물포를 출항하여 나가사키, 상하이, 홍콩, 동지나, 사이공, 싱가포르, 인도양, 콜롬보, 아덴을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후 지중해를 거쳐 약 53일만에 마르세이유까지 항해해 도착했다.
석하(石下) 김만수(金晩秀; 1858~1936)는 광무 5년(1901) 3월 16일에 주불 공사로 임명되어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가서 외교활동을 하다 배를 타고 돌아온 내용이 《주법공사관일기》에 남아 있다.
에밀 장 루이 부르다레 《En Corée》(사진:E. 부르다레)
E. 부르다레는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에 1년간 프랑스에서 Corée 알리기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는 E. 샹트르와 함께 리옹 인류학회에서 2차례에 걸쳐 Corée의 종교와 ‘Corée의 고인돌(1903.11.7.)을 발표하고 1903년 7월 4일 인류학회에서 〈강화도의 선사시대 유적〉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E. 부르다레는 풍부한 민족지학적 자료를 Corée에서 가져왔다. 조개 화석 및 모자와 신발 등 10점의 물건을 리옹 콩플뤼앙스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탐험했던 Corée 금강산의 비석이 있는 45개의 불교 사찰과 고인돌이 있는 강화, 원산, 당시 접근하기 매우 어려웠던 화산섬 케파에르의 지역과 풍경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가지고 사진전도 개최하고 대중 강연도 하였다. 1904년 여름과 가을에는 집필 활동에 전념하면서 Corée에 관한 학술 조사 보고서를 교육·예술부에 제출했다.
1904년, 그는 《En Corée》라는 책을 프랑스에서 출간했다. 그는 책에 쓰기를 “Corée는 유럽의 진보가 아직 더럽히지 않은 일종의 에덴동산과 같으며, 시적인 감성을 지닌 이들에게 감탄할 만한 많은 이유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비판적인 시각에 만족하지 않는 일부 여행가들은 아직 자신들과 독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움을 열린 마음과 깊은 공감으로 바라보곤 합니다.”라고 밝혔다. 그의 자서전적 여행기록은 여행하던 당시의 매혹적인 Corée(KOREA, 朝鮮)의 인삼재배, 왕릉, 무녀, 사당, 장례식. 프랑스공사관 등의 생생한 사진을 보여주어 호평을 받았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사진:연합뉴스)
책에는 탑골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가 실려있다. 그는 두 기념물을 통해 “오랜 왕국의 비장한 말년을 담은 듯한 느낌을 준다. Corée의 찬란한 과거를 알았을 때 적잖이 놀랐다.”라고 기술하면서, 이 유물은 Corée라는 작은 왕국이 외부에 알려질 가치가 충분함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부르다레는 책에서 “개간하지 않은 동산에 누구나 묘지를 마련할 수 있다. 정확한 묘표나 묘비가 없어도 자기 가족의 무덤을 찾아낸다.”라고 했다. 부르다레의 Corée에서의 첫인상은 양면성을 보여 “다리 위에서는 티 없이 깨끗한 흰 드레스만 보였지만, 나를 육지로 데려다 준 삼판에서 보니 조선 의복의 색이 흰색이라고는 하지만, 뱃사공의 냄새나고 더러운 누더기 옷을 보니 밝은 회색부터 가장 아름다운 윤이 나는 검은색까지 모든 색조를 아우르는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이 책은 유럽에 널리 알려져 여러 나라 언어로 소개되었다. 리옹 과학·문학·예술 아카데미를 비롯한 유럽문학대학교(ECL) 동문회 등 여러 곳에서 공개 강연의 주제가 되기도 했고 리옹 공과대학 동문회에서도 강연이 이루어졌다. 이후 많은 학자의 논문에 인용되었다. 또한, 당시 이 책은 신문의 신간 도서 코너와 프랑스 지리학회지의 서평란에 소개되었다.
알베르 칸(Albert Kahn)(사진:아폴로메거진)
필립 로슈포르 작가는 E. 부르다레를 조선(Corée)을 탐험한 최초의 프랑스 탐험가 중 한 명으로 꼽으며 여행과 활동을 통해 리옹 출신인 에밀 기메, 알베르 칸(Albert Kahn, 1860~ 1940)과 함께 19세기 말 유럽에 위대한 아시아 문명을 소개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보았다. 알베르 칸은 프랑스의 은행가로, 방대한 사진 프로젝트인 ‘지구의 기록 보관소(The Archives of the Planet)’를 시작하여 22년에 걸쳐 72,000장의 컬러 사진과 183,000m의 필름으로 구성된 방대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청년 E. 부르다레가 자신의 생애에서 민족지학적 특성을 불어넣은 곳은 오직 조선(Corée)뿐으로 그가 평생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Corée에 대한 그의 열정은 독보적이었다.”라고 평했다.
1880년대 인도차이나 철도건설 사진(사진:JuLie Vola)
1880년대 인도차이나 철도건설 사진(사진:JuLie Vola)
대한제국에서 프랑스에 돌아온 에밀 부르다레는 1907년경 알베르 뒤푸르가 수석 엔지니어로 참여한 청나라 윈난선(Yunnan Line)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1911년부터 1929년까지 스페인과 유럽 전역에서 활약했다. 1913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타후나 철도 건설의 수석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수백km에 달하는 철도 건설을 지휘하는 등 여러 주요 건설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후 인도차이나반도의 철도 건설 사업에 관여하다 은퇴하였다. 그는 1947년 11월 4일 니스에서 사망했다. 에밀 부르다레의 Corée 방문을 조사한 이는 ‘문화 간 컨설턴트’인 필립 로슈포르(Philippe Rochefort) 역사학박사이다.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사진:글항아리)
E. 부르다레의 저서 《En Corée》는 미술평론가, 사진작가 정진국(鄭鎭國, 1955~ )이 번역하여 2009년 5월 6일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이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번역가는 서울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한 전문가이다. 책에는 당시 조선 사진 30점이 실려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한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