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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마우리아 왕조 미술(Maurya王祖美術)
마우리아 왕조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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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 미술 (Maurya王祖美術)
기원전 317년에 세워진 인도 최초의 고대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가 꽃피운 미술. 이 마우리아 왕조 미술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서방 페르시아와 고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아 확립된 미술로서, 인도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미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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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 미술 (Maurya王祖美術)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찬드라굽타 셀레우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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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17년에 세워진 인도 최초의 고대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가 꽃피운 미술. 이 마우리아 왕조 미술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서방 페르시아와 고대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아 확립된 미술로서, 인도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미술이라 할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 미술은, 특히 조형 미술이 발달하였다. 마우리아 왕조가 발전시킨 조형 미술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인 아소카 왕 시대의 미술품이다.
 
아소카왕 시대의 유물로 유명한 것은 석조 건물이 있으며, 파트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약사 여래상, 남자 토르소 조각 등을 들 수 있다.
 
아소카왕은 불교를 장려하여 경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때 석조 사원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아소카왕 시대에 만들어진 석조 사원의 돌기둥이 마우리아 미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석주의 원료는 추나르산의 사암이다. 문헌에는 약 30개의 돌기둥이 있다고 전해지나, 현재 보존된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이 돌기둥은 종 모양을 하고 있으며,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동물 모양을 새겨 넣은 돌기둥도 있는데, 근육의 묘사가 뛰어나 당시 조형 미술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돌기둥의 조각은 아시리아나 페르시아의 돌기둥 제작 방식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외에 나무를 재료로 한 목조 미술도 발달하였다. 나무를 재료로 한 목조 미술은 주로 민간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인도의 토착신을 조각하는 미술이었다. 이러한 목조 조각의 대표작으로는 야크샤상·야크시니 여신상 등이 있다.
 
목조 미술은 석조 미술에 비해 다소 조악하고 수준이 떨어지지만 소박한 멋이 풍기는 작품들이 많다. 석조 미술이 아시리아나 페르시아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달리, 목조 미술은 인도 고유의 토착 미술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궁정 미술은 석조 미술이 주를 이루었으며, 토착 미술은 목조 미술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토착 미술은 풍요와 다산 등 민간 신앙을 주제로 한 조형 미술이었다.
 
인도의 초대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는 찬드라굽타이다. 그는 알렉산드로 대왕이 북인도를 침입한 것을 계기로 인도를 통일하게 되었다.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을 끝낸 기원전 317년경에 인도의 인더스강 상류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가다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다. 이후 인도 전역에 걸쳐 여러 나라들을 평정하면서 통일 왕조를 건설하였다.
 
찬드라굽타는 24년 동안 통일 인도를 통치하였으며, 그의 아들에 이어 손자인 아소카왕이 36년 동안을 통치하였다. 이 기간이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로서 문화와 예술이 가장 발달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당시 마우리아 왕조가 통치하던 지역은 동쪽으로는 벵골만 연안, 서쪽으로는 소파라·사우라스트라 지역,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서쪽으로는 탁실라 지역 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치안과 조세 제도를 정비하였지만, 아소카왕 이후에는 왕조가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아소카왕 이후에 6명의 왕이 더 재임하였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기원전 180년경에 최후의 왕이 장군이었던 푸샤미트라에게 살해당하면서 마우리아 왕조는 멸망하였다.
 
마우리아 왕조는 수자원이 풍부한 갠지즈강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농업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강을 통한 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갠지즈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를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이 왕조는 군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이 군대 제도는 왕조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보병· 기병·상병·거병 이외에 수군과 수송 부대도 따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왕조의 통치 지역이 광대하였던 만큼 지방을 효과적으로 다스려야 하였는데, 중앙에서 관료가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을 다스렸다. 지방 관리는 파견된 지방의 행정· 사법· 조세 등을 관리하면서 농민들을 중앙의 통치에 복속시켰다.
 
인도의 젖줄이라는 갠지즈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마우리아 왕조는 무역· 상업· 공업 등도 발달하였다. 이렇게 사회 제도 가 전반적으로 잘 정비되었기 때문에 마우리아 왕조의 문화를 인도의 전 지역으로 골고루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소카왕 이후 왕조가 분열되면서 각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세력들이 생겨나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국가가 형성되려면 강한 군사력도 있어야 하지만 국가의 정신적 기반이 되는 문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인도의 지역 국가들은 마우리아 왕조로부터 문화를 흡수하면서 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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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